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산에서 우는 작은 새요
꽃이 좋아
산에서
사노라네
산에는 꽃 지네
꽃이 지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 김소월, <산유화>
일반적으로 우리가 경험한다고 여기는 공간은 구획되어 있는 장소로 이루어져 있다.
구획됨에 의해 공간은 나뉘고 각 나뉜 공간들은 기능적으로 구분된다.
또한 나뉜 공간들은 나뉘어져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정체성을 공간의 중심에 둔다.
그 정체성의 힘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공간은 구획되는 경계를 갖게 되고 그 경계 내부에 정체성의 거주지를 만드는 것이다.
<산유화>(김소월)에서 '저만치'라는 심리적 거리를 읽어낸 김동리의 해석은 꽤나 설득력 있는 시도였다. 이 어휘가 조성하는 거리감은 닿을 듯하면서도 닿지 않는, 그러니까 적당히 가까운 듯 여전히 멀어서 그 욕망의 해소가 영원히 지연되는 존재론적 거리에까지 이른다.(그래서 이 욕망desire은 욕동drive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 정도는 동의할 만한 해석이고, 실상 해석이랄 것도 없이 어휘가 가진 함의에 대한 성찰의 값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누구로부터의 거리인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 거리감은 공간의 구별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치'에도 거리감이 있고, '이만치'에도 거리감이 있으며, 심지어 '요만치'에도 거리감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저만치'는 그 거리감의성격이 다르다.
'저만치'가 '이만치'와 명백히 다른 공간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은, 그 둘 사이에 구획되는 선이 있고, 혹은 구별되는 경계가 있고, 그 경계의 이쪽과 저쪽이 다른 공간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다른 공간은 중첩이 될 수는 있어도 섞이지는 않는다. (섞인다면 그건 다른공간이라 할 수 없으므로) 그리고 다른 공간은 볼 수는 있어도 소통하지는 않는다. 애당초 이 공간의 차이는 마치 이차원과 삼차원이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다름으로서 존재한다. 이를테면 <거울>(이상)에서 거울 속의 나와 거울 밖의 나의 관계 같은 것이다. <참회록>(윤동주)에서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에 비친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그 사람의 본체가 '나'(화자)인 경우에조차 단절된 저쪽 공간에 존재한다. 그래서 소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국 두 인물의 정체성이 다르기 때문에 생긴 것이고 본디 하나이지만 나뉘게 된 까닭이다.
다시 <산유화>로 돌아와서, '저만치'의 거리감이 두 개의 공간을 전제한다고 할 때, 그것이 누구에게 두 개의 공간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산에서 우는 작은 새'로 인해 간단치 않게 된다. 친숙한 비유이자 투사적 개념으로 '새'는 '나'(화자)의 불가능성을 대체하여 욕망을 해소시키는 대리물이다. 투사체라고도 한다. 이 '새'를 통해 나의 욕망은 상상적으로 실현된다. 이 실현이 현실에 의해 깨어지면 상상적 세계에도 균열이 생기게 될 것이다. 마치 <모란이 피기까지는>(김영랑)에서 꽃이 피기를 고대하는 '나'에게 꽃이 져 버렸다는 사실을 일깨우는 '오월 어느 날'은 꽃이 피었다가 지고 진 꽃이 땅에 떨어져 더운 한낮의 볕에 시들어버린 시점까지의 기다림의 상상적 세계를 드러내보이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 '나'는 꽃이 져 버렸다는 사실로 또 삼백예순 날을 하냥 우는 것이다. 그 슬픔이 다시 꽃이 피어남으로 인해 기쁨으로 바뀌면 다시금 한해를 기다림으로 구축했던 상상적 세계가 작동한다. (아마도 '나'는 꽃이 피어난 기쁨을 누리지도 못하는 것 같다. 기다리다 보면 꽃이 져 있고 슬퍼하면서 또 기다리고.) 그래서 <모란이 피기까지는>은 상상적 세계와 현실이 계속 교차하며 중첩되는 착종의 심리 세계를 보여주는 것인데, <산유화>에서는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이 상상적 세계를 깨뜨리지도 않고 '새'가 '나'와 다른 존재임을 깨닫는 일도 일어나지 않으며 그래서 내가 새와는 달리 꽃과 거리감을 느낀다고 증거하지 않는다. 오로지 '저만치'가 독자인 내게 나와 꽃 사이의 거리감을 주는 단서처럼 여겨지는 것은 자기중심적 발화의 습관 때문이다.
이제 '저만치'의 발화 중심을 경계 너머의 꽃을 바라보고 있는 '나'로부터 물러서 '산'과 '산' 아닌 곳을 모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의 존재론적 주관자로 옮겨 보자. 그렇다. 공간의 분리는 '산'과 '산'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며, 다만 산수화의 고원법을 사용한 그림처럼 산의 경계는 흐릿해진다. 이것은 '저만치'가 두 공간을 절연시키지도 연결짓지도 않는 모호함을 유지하는 것과 원리적으로 통한다. 이런 공간의 경계와 배치 때문에, 이 작품의 1연과 4연의 꽃이 피고 지는 과정은 어떤 무엇과의 갈등도 없고 대결 의식도 없고 아예 그 거리감에 대한 의식 자체가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꽃이 이 작품의 주인공이 아니라 산 자체가 주인공임을 시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저만치'의 거리감은 '꽃'과 '산' 아닌 것 사이에서 조성되는 것은 분명하지만 '산'과 '꽃' 사이에서 그런 것은 아니며, 결국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는 '산에 피어 있네'와 같은 진술이 된다는 점에서 이 동어반복(산에 산에 피는 꽃은 산에 피어 있네)이 보여주는 것은 '꽃'의 존재 의미가 '산'에 피어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새'가 산에 사는 이유인 '꽃'도 실은 핑계거리였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저만치'가 존재론적 거리감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나'(화자)와의 거리 때문이라기보다는 '산'이라는 공간적 정체성 때문이라고 할 만하다. 그 공간은 무시로 '꽃'이 피고 지는 곳이며 다른 곳과 공간적으로 분리되게 만드는 존재의 방식이 작동하는 곳이다.
* <산유화>에 대한 작품 분석은 다른 글을 통해 다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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