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오랫동안 시 쓰는 것을 잊었더랬다.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라고 배운 뒤로 시는 써서는 안 되는 것이 되었었다. 나쁜 시 같으니라구. 아주아주.
시 쓰고 웃었다

[自作詩] 그 많던 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하필 그때 방송에 나온 구질구질하고 유쾌하던 이 잡는 얘기에 어린 시절 겨울 화롯가에서 옷 벗어 불에 쬐며 똑같은 경험을 했던 얘기를 덧붙이며 신나게 꺼내들다가 택시운전기사 아저씨와 키득거리다가 궁금해졌다 내가 가르치는 스무 살 청춘들과는 소통도 되지 않는 이야기로 신이 나 있는 나의 기억 속의 이들은 어디 갔을까 증명도 할 수 없고 옛이야기로 물릴 수도 없는 이 생생한 허구가 내 기억 속의 온갖 사태들을 호출해 낸다 이 어정쩡한 사십대는 한때 유신 시대 끝물에 떠밀려 칠십구년 시월이 우울하도록 강요당했고 책을 덮고 그 대신 책을 꺼내 읽으며 그러면서도 책을 부둥켜안고 놓치지 않으려고 거리에 나가서도 팔사년, 팔오년, 팔육년, 팔칠년 시간의 능선 아랫길을 조심조심 걸었더랬지 황공하게도 삼팔육이라는 이름에..

시 쓰고 웃었다

[自作詩] 추격자

-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영화를 끝까지 견디게 하는 여섯 가지 기술 이런 생각을 했을 거야, 감독은 미국 사람들이 흔히 갖다 붙일 이유가 없을 때 이러잖아, 잘못된 시간, 잘못된 곳이었을 뿐야 어쩔 수 없이 위험에 빠진 미진은 어쩔 수 없잖아, 죽을 운명이었어 죄 없이 남의 안부에 관심이 많고, 지나치게 타자와의 유대에 의존하면 그것도 죽을 운명이지 이런 엑스트라적 인생을 위해서는 죽는 순간쯤은 곧바로 건너뛰게 할 영화적 기법이 있어 저마다 고독한 비정, 몹쓸 세상에서 미진 그녀의 어린 딸이 손을 내밀면, 그런다고 잡아줄 수는 없는 거야, 아마추어 같이 슬픔을 견디기 어려운 자에게는 비를 우는 소리 고통스러운 자에게는 라디오 음악을 친절하게도 교통사고와 깊은 잠을 함께 제공하는 자비, 가능하면 그것도 그냥..

시 쓰고 웃었다

[自作詩] 님 주무시네

사십이 되자 아내는 마음먹었던 대로 학생이 되었다 다들 부러워하는 시간을 얻었다면서도 아주 죽을 맛이라며 학교를 다니고 있다 가정은 나에게 맡긴다고 선언했던 그녀는 가엽게도 선언만 하고 끝냈다 아침이 되자 여전히 주부였고 다들 깨우는 일이 여전히 그녀의 몫이었다 아이들은 그녀가 학생이라는 걸 별로 의식하지 못했고 나는 월요일마다 짐 싸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학생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게 아내의 사십이다 가슴에 작은 고양이를 안고 파란 스웨터 까만 테 안경 고개를 약간 숙이고 아름답게 남겨진 아내의 이십대의 시절이 사진에 새겨져 있다 나에겐 그것이 학생을 막 끝낸 그녀의 모습이다 하지만 사랑한다는 말이 쑥스럽게 된 나이 사십이 다들 거쳐 가는 나이 사십이 아내를 막 지나치려 한다 사십의 아내는 ..

시 쓰고 웃었다

[쓰다] 노트북은 왜 키보드를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 노트북을 챙기려면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시 쓰고 웃었다

[쓰다] 우공이 산

우공이 산 처럼 앞에 놓여 있다 돌아갈 수는 있지만 그럴 수는 없는 우공이 산 처럼 두터운 시집을 건네주시며 별 말씀도 안 하신다 지난 번 여행시초를 시초(詩草)라 하셨을 때 우공이 산 으로 들로 다니실 때만 사진에 시를 담았던 것이 아니라는 질투가 샘 솟았다 이게 시라도 되었으면 질투가 나의 시라도 된다면 우공이 산 과겸자 (2008. 3)

시 쓰고 웃었다

[쓰다] 노트북엔 왜 키보드가

노트북은 간편하라고 준비해 놓고 키보드가 작아 어색하다 어색하지만 노트북보다 더 큰 키보드를 꺼내 키보드 앞에 키보드 놓고 글을 쓴다 쓰지 않는 키보드는 먼지 먹어 쓸 수 없고 쓰는 키보드는 거추장스러워 갑갑하다 노트북은 골렘처럼 커 간다 나갈 일 있어도 노트북은 키보드 없이 나가지 못한다 도무지 가방 안이 또 갑갑하다 그냥 책상 위에 놓아두고 이 모든 건 저 쓰지 않는 키보드 탓이다 (2008. 03)

시 쓰고 웃었다

[쓰다] 초원의 집 1

오후는 아직 멀고 나는 집을 나서 살던 옛 동네 응암동의 언덕을 향한다 거기엔 언제나 까만 염소의 등을 쓰다듬고 있는 빵모자 쓴 꼬마 아이가 있다 아이는 언덕 아래를 말끄러미 내려다보며 작고 동그란 눈을 빛낸다 미안하게도 나는 아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 아마 그건 아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이의 어깨를 짚을 수 없는 멀지 않은 거리를 두고 나는 아이의 내일을 마치 아이가 나의 어제를 비추어보듯이 비추어본다 아이는 언덕을 내려와 세상에 집을 짓는다 집 너머로 멀리 산이 보이고 그 앞에 언덕이 있다 아이는 꿈을 꾼다 앞산 너머에 바다가 있다 아이는 언덕을 향해 내달린다 앞산 너머에 태양이 숨어 있다 한 패의 소년들이 집 앞으로 몰려든다 열세 살 소년이 별을 달고 여덟 살 소년이 나무 기관총을 매고 여섯..

시 쓰고 웃었다

[쓰다] 초원의 집 2

일요일 아침 초원의 집 흑백 텔레비전 속 푸른 들판 그 들판의 세 소녀는 향기로운 시내와 공기들의 한가로운 숨소리를 따라 어울리다가 구름들이 저 멀리에 어깨를 맞춘 언덕의 나무 밑에서 잠시 쉬고 있었지 배워야 할 것들이 제 스스로 가르쳐 주는 배워야 할 것들에서 배움을 얻는 절망이 제 스스로 위안을 주는 초원의 작은 집 세상의 모든 학교 (2008.04.17)

시 쓰고 웃었다

[쓰다] 죽은 빨간 병아리

아빠, 병아리가 죽었어 작은 딸아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응, 그래, 그렇구나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그냥 그렇다고 맞장구치고는 신문을 넘긴다 넘기다가 이상하기도 해라 우리집에선 병아리를 키운 적이 없다 나 모르게 꾸미고 있을지도 모르는 가족들의 음모 아이의 비밀 궁금하구나 익숙한 집안 탐문하는 시선 나 없이 이루어졌을 역사의 흔적을 찾아 아닌 척 집안을 살피다가 창가쯤 눈이 멈추었을 때 화들짝 놀란 보라색 튤립 두 송이 옆에선 꽃봉오리 떨어진 대롱이 힘없이 기댄 창가 아빠, 빨간 내 병아리 금세 내 옆으로 달려와 치켜 올려든 손에 길에 떨어져 있었다는 빨간 죽은 병아리 아무리 봐도 시든 튤립 한 송이 (2008.04.19)

공부를 위한 준비

[성찰] '죽은 빨간 병아리' 쓰기에 대해

새롭자고만 쓰는 시는 아니지만, 쓰고 나서 며칠 지나 보면 시는 어느새 먼저 태어난 것들을 많이 닮아 있다. 아마도 쓰고 나서 차츰 닮게 되는 것 같고, 어쩌면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닮아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닮지 않기를 의식한 적이 없으니 닮기를 의식한 적도 없을 터인데, 이것 참, 곤란하다. 눈에 밟히니 온전히 내것 같지도 않고 아닌 것 같지도 않다. 온전하다는 말이 무리다, 하고 위안하려고 해도 신장개업해 놓고 이웃 중국집 짜장면 흉내낸 것 같은 꺼림직한 느낌이 가셔지지 않는다. 호흡론을 제기해 놓고, 나는 과연 어떤 호흡으로 말을 꺼낸 걸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러고 보면, 내 자연스러운 호흡이 시로 모습을 얻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표현의 강제 같은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를테면 바로 앞의 시..

misterious Jay
긁적거리면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