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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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어이쿠

시험 삼아 써 본 시 종이 한 장 떼어 적어 두었네 '어이쿠' 하는 대목에서 하루를 묵혀 두었다가 사라져 버렸네 종이 끝에 걸쳤던 '어이쿠' 혼자 하루를 묵고는 시는 생활이 되고 생활은 매우 시적이라 운만 뜨면 술술 나오네, '어이쿠' (2009.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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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풀다

집으로 돌아와 연달아 아홉 번을 방귀 뀌었다 크고 작은 방귀들이 비로소 제 소리를 찾았다 맞지 않는 인간들에 응대하느라 억누르던 방귀가 세 번, 묻지 않는 학생들을 견뎌 내느라 참고 있던 방귀 한 번, 거기에 체면 때문에 방귀 두 번, 소소한 일들에서 뀌다 말고 그만 둔 방귀들까지 도합 아홉 번이다 이걸 참느라 온갖 구질한 냄새와 싫은 소리 내뿜었다 그걸 감추느라 짐짓 모르는 척하는 표정과 엉뚱한 관심 내보였다 (2009.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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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벽

선선히 열리지 않는 문 손잡이 돌려 밀어도 열리지 않는 문 몸으로 밀어내려 해도 꿈쩍 않는 당겨도 열리지 않고 끌어도 열리지 않는 문 결국에는 너는 너 혼자뿐인 내가 그려 넣고도 그림의 떡이 되어 버린 문 열리지 않아 좌절하는구나 천국의 문 경주하지도 않고 쟁론하지도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서 있는 (2009.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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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시를 쓰거나 당신과

시를 쓰다가 그렇지, 밥상 앞에서 당신과 마주 앉아 당신을 보면서 얘기를 하거나 혹은 듣거나 전화기를 내려놓고 당신과 마주 앉아 잠시 물어보자고 당신이 주는 힌트를 시에 걸쳐 놓고 늘어지기 전에 한 줄, 그리고 놓치기 전에 한 줄 마주 앉아 당신과 얘기를 하거나 혹은 듣거나 쓰자고 (20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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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그 해 여름

그 사람은 옛날 눈부신 여름 무작정 버스에 올랐던 여행의 종착 낯선 동네엔 햇살 가로수 햇살 아래 눈부신 자태 가만히 듣던 모습 아득했던 길었던 한낮 향기롭던 눈부신 젊은 날 무작정 버스에 올랐던 여행의 시작 (2008.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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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2

존경하는 재판장님 존경하는 의원님께서 존경하는 의원님 하고 부르는 걸 못하게 막아주세요 존경하는 의원님은 존경하는 의원님 하고 부르기는 해도 한 번도 존경 않는 의원님 하고 부르지는 않아요 답답한 의원님 한심한 의원님 멍청한 의원님 하지도 않고 앉으나 서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존경하는 의원님, 네, 존경하는 의원님 하면서 매번 시간을 저당하고 있네요 아마 다 모으면 존경하는 재판장님 (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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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라] 존경하는 재판장님 1

존경하는 재판장님 어제는 재판장님께 편지를 썼쎄요 재판을 잘 해 주셔서 고맙다고 썼쎄요 아직 판결도 나지 않았는데 썼쎄요 판결이 났더라면 안 썼쎄요 내일이라면 안 썼쎄요 어제라서 재판장님께 쓴 거에요 존경하는 재판장님 (2008.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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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도심에 부는 바람

도심에 부는 바람 불온한 기운 전혀 없는 건조한 바람 시청 앞 광장을 헤매다가 태평로 앞을 되돌아나올 땐 아무의 바람 마저 갖지 않게 된 늦은 오후의 바람 큰 길을 따라 내려오다가 계절이 바뀌는 바람에 길을 잃어 버린 바람 그 너머 국일관 앞길에 울리던 구호를 자욱히 덮어 버렸던 바람 그 너머 비 내리는 종오 거리에서 신문팔이 소년 떠밀고 지나갈 때부터 있던 바람 사라진 거리에서 버젓이 불고 있는 바람 한 사람의 잘못이 가져온 시작은 아주 작았던 어긋남 (2008.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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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주먹을 위한 기도

- If I have a hammer(peter, paul and mary)의 몹쓸 변주 기도하자 내게 만약 쥘 수 있는 주먹 있다면 꼭 해야 할 일 있노라고 애써 손 내밀지 않고 불면의 낮과 밤 바꾼 두 손의 축복 감사히 받아들이겠노라고 만약 내게 쥘 수 있는 주먹이 있다면 가슴을 툭툭 쳐 내가 가진 믿음을 증거하며 쥘 수 있는 주먹 있다면 그 주먹 불끈 쥔 팔을 들어 내보이겠노라고 만약 쥘 수 있는 주먹 있다면 당신들을 일으켜 세우고 여전히 힘이 남아 쥘 수 있는 주먹 할 수 있는 일이 남거든 착각과 오해의 벽을 깨뜨려 다행히도 좀 더 강한 쥘 수 있는 주먹을 기억하게 하겠노라고 당신들이 내 쥘 수 있는 주먹을 떠올렸을 때 그 기억 속에 나는 없고 주먹만 남았을 때 당신들이 온전히 기억해야 할 일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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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60년대 세대의 독법

색색이 늘어진 비닐 차양 뜨거운 햇살 피해 들어선 어둑한 실내 비닐 커버의 낮은 소파 엽차잔 옆에 놓인 수란 얹힌 하얀 잔과 월남에서 돌아온 새까만 김 상사 꽃무늬로 멋을 부린 셔츠에 밀집 모자 흰 구두 눈부신 거리 뜨거운 공기 피어오른 먼지 위로 흩뿌려지는 한 바가지 물 밀짚모자 쓴 아버지 뒤를 바짝 붙어서 밀짚모자 쓰고 따라들어간 어두운 뒤편에는 당신들이 아련하게 마음에 둔 20년대 카페와 나의 60년대 다방 이십 세기 초입에 태어나 가장 먼저 근대를 호흡했던 당신들과 만날 때마다 매번 엇갈리면서도 이해하는 척할 필요도 없이 자연스럽게 당신들과 이야기 할 때마다 60년대 세대의 애틋한 기억들 역사를 반복하는 것처럼 호흡할 때마다 당신들을 읽는 60년대 세대의 감수성이 당신들과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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