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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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하얀꽃

아버지의 머리 위에 하얀꽃 핀 뒤로 산꽃들은 죽고 죽은꽃들이 살았다 아버지 머리 위에 죽은꽃들이 산꽃들 대신 어리광을 부렸다 아버지 머리 위에 죽은꽃들이 시들시들 검은꽃이 피어났다 아버지 머리 위에 검은꽃 핀 뒤로 죽은꽃들은 죽고 대신 산꽃들이 꽃단장했다 나는 아버지 머리 위에 하얀꽃 뿌리며 죽은꽃 피기 전의 옛일들을 생각하였다 산꽃들이 지천에 있었다 (2011.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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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관계

(1) 시작이 그랬다는 것이다 만나기 전부터 오래 우리의 관계는 태어나기 전부터 미리 장만해 두셨다는 소년소녀 세계명작전집 그 속에 굳어져 있었던 당신의 거울 이미지 어린 시절은 서로에게 장남이라는 족쇄를 채우고 커 가면서 종교라는 믿음의 회의라는 형식과 회의의 믿음이라는 형식으로 서로 충돌하면서도 다 커서 서로의 삶에 대한 간섭으로 부딪----히----는 고통을 겹겹이 껴 안으면서도 커 가면서 집에서 벗어나는 시간이 길어지고 다 커서는 만나지 않는 시간의 간격이 길어지면서도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렇게 벗어나지 못했던 우리의 관계는 (2)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신을 병원에 모시고 난 뒤 드문드문 얼굴을 보이면서 죽음이 저만치서 자기의 시간을 노래하고 특별히 집착할 것도 슬퍼할 것도 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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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후생식당

맛집이라고 할 수는 없다 청국장과 된장비빔밥 먹으러 간 것이었지만 사실은 깻잎절임 때문이다 절임이라 소복히 쌓였건만 생으로는 수북한 인심이었을 것이니 대구 강연을 헛걸음한 어느 날 청주로 돌아오다가 청원 톨게이트 지나 삼거리에서 그만 반대 방향으로 꺾은 터였다 태양은 뜨겁고 촌스럽게 늘어진 주렴 틈으로는 열뜨고 게으른 바람이 살짝 들어오고 중노인이 된 식당 주인 아주머니는 부스스한 낮잠을 구석으로 치우고 일어난 기색인데 나 또한 게으른 자세로 의자를 밀어 앉아 어둑한 실내를 즐기며 보리 숭늉을 기다렸다 내가 들어온 거리에선 남겨졌던 자취들이 뜨겁다거리며 자리를 뜨고 있었다 (2011.09.16) ----------내가 서원대에 온 지 14년이 지나는 동안 문의면에는 여섯 번쯤 갔는데, 세 번이 접대용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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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하지 말았어야 했던

하고 싶은 일들은 저만치 있는데, 거기 누가 있어 가로막고 서서 먼저 이것도 부리고 저것도 앞장서다가 이 일도 돕고 저 일에도 간섭하다가 내쳐 천리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찬찬히 발을 내딛으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쩔 것인가, 그렇게 살아오며 어느덧 천리길만 꿈꾸다가 그 길에 나설 길 없고 어리숙한 수고가 켜켜이 쌓여 새로 천 리 길을 이루고 그 길 어귀에 나의 어리석은 고뇌가 낡은 편자처럼 뒹구는데, 나는 한 걸음, 호사가의 말 다음엔, 천리길, 이런 몽상가의 꿈이 닿지도 못하는, 저만치, 가기만 했어도 되었는데, 나는 (2011.06.29) (그림 자료 출처 : ....는 오래 되어서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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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었었-

문제란 세상으로의 투신도 아니고 졸업을 할까 말까 하는 것도 아니고 연애의 끝도 아니고 -었었-이었었다, 이렇게 지금은 쓸 수 있게 되었지만 쓸 수 없었다 -었었-은 80년대 초반까지는 완료로 배웠고 80년대 중반 이후론 낭비였으니까 완료는 과거를 중첩시키고 중첩되는 것은 축적되는 게 아니라 그저 불필요하다고 떠밀려 사라지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었었- 하며 혀를 잇몸에 부딪힐 때마다 잘리고 떨어져 나가 없어지는 기억들이 안타까웠던 것이었으니까 나도 동조를 했던 거다 -었었-을 쓰지 않고 아니 -었었-을 쓰지 못하고 알고 보면 완성된 기억들이 별로 없었으니까 그렇게도 이룬 것 없이 방황하면서도 간직하고 싶은 것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괴로웠었었던 것이니까 (2011.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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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책 읽는 사람은

책 읽는 사람은 위험하다 그-녀는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의 가능성에 금 그어 놓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 놓지 못한다 그-녀를 감시할 수 없다 책은 그-녀의 행동을 막을 수 있다 책이 그-녀의 마음을 붙잡아둘 수 있다 책만이 그-녀를 감시할 수 있다 그-녀를 묶어놓을 책을 가져다 주어라 그-녀를 오랜 생각에 빠지게 하여라 그-녀를 스스로 감시하게 하여라 그-녀는 무슨 행동을 할지 모른다 위험하다 책은 알고 있다 (2011.01.10) Woman Reading in an Interior, by Carl Holsoe 사이트 여행 중에 우연히 아래와 같은 블로그 게시물을 보았다. 책 읽는 여자들이다...라.... http://blog.naver.com/gisant/10030006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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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뒷모습을 보다

작아진 뒷모습은 흔들리지 않고 발걸음마다 또렷했다 하지만 횡단보도 중간부터 나는 마음이 흔들려 되돌아서고 아닌 게 아니라 이십 년 가까이 이십년 공부 기간 동안 홀로 마음속에 경쟁 상대로 삼고 경쟁 상대가 되어 준 그것이 행복했던 이십년이 되었던 것이었지만 갑자기 되돌아선 것이다 공도 울리지 않고 수건이 던져지지 않고 스스로 작은 뒷모습을 하고선 길을 건너시는 것이다 달리 옮길 더 좋은 땅을 찾기 힘든 당신의 집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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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글빚 1

편지에 담긴 것이 어정쩡, 어쩔 줄 몰라 하는 포즈다 미안해 하면서도 답장을 못 보내는 내 표정과 비슷하다 하루의 끝과 짧은 밤을 알리는 천공의 불빛들, 긴 밤 아니더면 기어이 붙잡아 두고 있어야 할 새벽의 글빚들 (201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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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김치만큼 사랑해

수나야, 언닌데 언니 얼마나 사랑해 아니, 언닌데 언니라구, 응 언니 얼마나 사랑해 얼마나 사랑하냐구 뭐 응 김치만큼 사랑한다구 얘, 그런 말이 어디 있니 들었니 수나가 그러는데 날 김치만큼 사랑한대 웃기지 않니 김치가 뭐니, 김치가 (200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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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식육 식당

보은 지나서 상주 김천 넘어가는 길은 한창 배가 고플 때였다 불을 밝혀 식당을 찾아 내달리는 고개와 모퉁이들은 교대하며 식탐을 선동하고 갈 길은 여전히 멀었다 속도를 줄였다가는 내지르며 차는 반복하여 식육 식당들이 연이어 자리 잡은 더 깊은 길로 들어섰다 확고한 편견이 내 어깨 너머로부터 팔을 뻗어와 더 먼 곳을 향해 있었다 -- 거기 식육 식당에선 어떤 야만이 벌어지는 게요? 잘 갈린 칼 대신 도끼가 돌려 있을 법한 식당 주방이 언뜻 보이고 사라질 때마다 자취처럼 차창에 남겨진 '식육'에서 식인을 연상하고 식당 뒤켠 어딘가의 능지처사(凌遲處死)를 연상하고 소나 돼지의 고통스런 사람 흉내를 연상했다, 초파일 연등처럼 식육 식당들이 그림자를 흐려 가며 쫓아오고 차는 가슴을 움찔거리다 내달렸다, 경험이 내 ..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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