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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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50

꺾어진 백이라 세 번째 전환기를 첫 번째마냥 보내는 이즈음이다 투신하여 사회로 나오던 때에는 내 뜻이 아닌 뜻대로 교단에 서게 되었고 두 번째 인생 전환기에는 각종 질병 검사를 국가에서 받게 해 주었지 세 번째 전환기가 하필 꺾어진 백이라 꺾어진 오십 때와는 사뭇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혼자 해결해야 할 것을 본의인 것마냥 혼자 하면서 의젓해져 가고 있는 게 꺾어진 백의 기백이다 사실 기백은커녕 백의 반도 안 되었다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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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살 집

살던 집을 나와 새 집을 들어가는 길은 너무 멀다 너무 다르고 너무 틀리다 틀리다 '틀리다' 이 말이 이 경우엔 맞는데 역시 살던 집은 낡고 헐더라도 살던 집이다 남들이 알면 우스워할지 모르겠지만 살던 집은 집이고 살 집은 아직 집처럼 여겨지지 않는다 전전하며 긍긍하는 팔월의 늦은 밤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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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식물적 상상

그러면 내 상상은 뜻하지도 않는 의심의 상황으로 뻗어나간다네 꼼짝도 할 수 없다네 옴짝달싹할 수 없다네 그대를 완전히 소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 때면 (2012.11.) * 나는 그러한 그대의 그대가 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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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다 날아가 버렸다^

한 번도 써 먹어 보지 못했던 이 말무릎 탁 치고 깨달았네시 따라 시인 가듯이시인 따라 시도 가네 얘기한 적 있었지행운이로세, 요절한 시인이란그는 죽어도시인에겐 영생이 요절하지 못한 시인은 살아서 심문이 잡혔다! 사진에 찍힌 저 시인시는 시인을 먹여 살리고시인은 시를 죽인다(2012.11.27) ^ 오마이뉴스 2012. 11. 27 기사 '이제 김지하의 시는.... '없습니다''(이명재)에서 따옴. ----------------------------------------아랫글은 오마이뉴스 2012. 11. 27일에 실린 이명재 님의 글 중 끝부분이다.이명재 님 덕분에 쓰게 되었다. "다 날아가 버렸다." 소리에 '눈'이 있고시에 '착상점'이 있다면,이 글에 선언이 있다. 무릎 탁 치고, 어이쿠, 태어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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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떠날 줄 모른다

따뜻하지 않은 봄날 날빛 드는 창가에 날지 않는 새가 떠날 줄 모른다 묻지 않는 너와 나는 대화를 한다 하루가 잠시는 짧았지말하고 밤은 꽤 길거야듣는다밤은 새삼 추울 거야말하고하루가 꽤 길거야 듣는다 창가에 연민이 머문다 어제는 내린 것이 비였을 거야비유의 장막을 들추면 너는아득한 목소리를 남긴다 새가 장막 속으로 난다날아가지 않는다 (2012.04.12) * 묻는 것은 내 구속의 집으로 그대를 데려오는 것이다. 묻지 않고 대화하는 먼 장면은 노부부의 티테이블처럼 우아하거나 집단적 독백처럼 무료해 보인다. 가까이 가 보면 시간이라는 신뢰의 끈이 그대와 나를 잇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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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주머니 속에

주머니 속에 종이 몇 장 잡힌다 카드 쓰고 받은 영수증영수증 같은 반으로 접힌 삼천 원톨게이트 영수증 영수증 같은 순번표 한 장하루가 몇 장의 종이로 손바닥에 앉아 있다 일부는 돈의 흔적으로 남고일부는 돈의 흔적의 흔적으로 남았다모든 게 돈으로 환산되고 나니다른 편 주머니 속은 충만한 허무 하루는 쏜 살의 촉 끝에서 바쁘게 앞서 가고종이들은 손바닥에서 날린다쫓아갈 수 없는 하루는 보내고대신 종이 몇 장 뒤잡는다바쁘게 쫓아가는 척(2012.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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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익숙하지 않은 밤

8시 반쯤 집을 나와 언주로를 타고 북으로 달리다가 두 번 방향을 꺾어 동호대교를 건넜다 이렇게 몇 차례 길을 타고 방향을 꺾어가며 병원 장례식장에 이르렀을 때 삼일 낮밤이 꿈결 같이 지나갔던 지난 해 끝자락 아버지의 마지막 거소의 그 익숙한 분향소 안으로 걸어들어가는 내 검은 구두가 형광등에 연신 빛나고 검은옷의 얼굴들과 초췌한 유족 무심히 자기들끼리 얘기를 나누는 근조화환들이 분별되지 않은 채 늘어서 있었다 몇 번쯤 손을 탔을까, 지쳐 있는 국화 다발 속에서 그나마 앳된 놈 하나 뽑아 제단 위에 올려두고 한 번도 뵌 적이 없는 고인 앞에 예를 올렸다 그분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어느 문상객이 엎드려 절하는 도중 되내이고 또 되내이면서 아무리 반복해도 익숙하지 않을 이 일에서 얼마나 도망치고 싶어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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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흔적

하룻밤이 지났다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밤을 새워 고심하던 문서 연애에 관한 문서 아직 이름도 갖지 못한 문서 하나 사라졌을 뿐이다. 새기지 않은 서판에 남겨져 있지 않은 흔적에 미련이 머문다 만들다 만 요리에는 남겨져 있지 않은 흔적 존재하지 않는 조리에만 남은 차가운 흔적 연애에는 남아 있지 않고 좌절된 생각들에 상처로 남은 흔적 (2012.03.21) * 어떤 문서일지 고심하면서 백만 개의 단어를 소환하였다 모든 가능한 의미들에 '연애'가 가장 부합하였다 놓아 두었던 단어가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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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슬픔 없는 나라 ㅡ 60년전

상상력 없는 정치인들이 기초하고 상상력이 두려운 교육자들이 정당화하고상상력이 과한 시인들이 뒷받침했다 슬픔 없는 나라를 만들려면 정치인들은불행한 일을 없애야 한다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다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일은슬픔을 연상시키는 단어들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너무 일찍 알고 있었고그 단어들 없이는 정치를 할 수 없다는 것을알고 있었고그것도 당장 그만 두어야 한다는 것을알고 있었으나다행히 60년쯤 유예할 수 있는 인류 중대사,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일을 한 것이라는 것을자부심을 갖는 것도 괜찮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슬픔 없는 나라를 만들려면 교육자들은아이들이 삶을 긍정하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다가장 현실적이고 효과적인 일은좋은 것만 배우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이미 알고 있었고슬픔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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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 이삭줍기

이삭줍기는 탈곡이 끝난 뒤에야 시작된다 털어내고 줍는 것은 모두지 못해서 그리되었다만 한편에선 모두 모두지 못하기를 바라고 한편에선 모두 모두지 못하고 줍지도 못하기를 바라서 잔인한 필연, 잔인한 선택이 되고 만다 이삭줍기는 (2011.10)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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