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를 디스코에 목말라 하던 까까머리 중학생이 있었다. 80년대를 ‘매카닉’(mechanics)에 미쳐 살았던 얼굴 하얀 중학생이 있었고, 90년대를 게임에 빠져 살았던 사복 입은 중학생도 있었다. 다들 입시에 중독되어 학교와 학원을 쳇바퀴 돌 것만 같았던 시대였지만, 어딘가에서는 꼭 이러한 학생들이 있었고 그 수는 결코 적지만은 않았다.
이쯤 얘기하고 나면, 여러분은 그 다음 대목을 예상한다. 그래서 그들의 미래가 참담해졌다고 말하는 건 너무 뻔한 얘기일 터이니 오히려 그들이 성공했다는 줄거리가 나올 게 아니냐고 말이다. 나는 여러분이 그렇게 예상할 줄 았았다며 흐뭇한 미소와 함께 동의한다는 고갯짓을 한다. 여기에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때의 중학생들 가운데에는 지금 신세대 문화 평론가며, 기계역학 전문가며, 프로 게이머들이 있다고.
21세기의 문화계 지형에, 그뿐 아니라 넓게는 경제계에 이를 정도로(!), 중대한 지각 변동을 일으킨 이 새로운 세대를 이끈 것은 다양한 하위 문화들에서 놀란 만한 전문성을 취득했던 취미광(mania)들이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식이다. 일본 만화에 열중했던 한 소년은 일본 만화에 대한 수입 금지 조치가 내려지면서 한글로 번안된 작품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소년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일본 만화책을 직접 구하게 되고 일어로 된 만화책을 읽기 위해 자발적으로 일본어를 배우게 되며 그 취미가 농밀해지자 작가를 연구하고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일본 사회를 연구하고 그 시대와 문화의 상관 관계를 연구하게도 된다. 십 년쯤 지나 청년이 된 그는 요즈음 만화 평론가로 불리기도 하고 문화 평론가로 불리기도 하고 그 비슷한 분야에서 문화 기획자로, 일본어 강사로, 대학 교수로 불리기도 한다.
소수의 경우이기는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현상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렇게 되었던 배경에는 그 시절 다수의 청소년들이 디스코와 록에 빠졌었고, 모형과 만화, 애니메이션에 빠졌었고, 게임에 빠졌던 사태들이 있다. 설령 입시 공부 때문에 그렇게 빠지지는 못했다고는 해도 적어도 그걸 부러워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모두 장성하게 되자 새로운 문화적 수요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흐름이다.
물론 공부 안 하고 음악에 미치거나 모형 만들기 취미에 열중하거나 게임에 중독되었던 이유로 소수의 청소년들이 나중에 전문적 직업군의 한 자리를 만들어 차지하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에 몰두했을 때, 그들은 단지 몰두하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연구하기도 했고 그냥 연구한 것에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더 깊이 연구했던 것이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그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할 만한 것이 별로 없던 시절에, 취향으로서의 가치를 갖는 거의 유일한 취미가 ‘독서’밖에 없었던 바로 그 시절에, 내 유년 시절에, 책 읽기를 좋아했던 또래의 수많은 어린 학생들이 ‘전집’을 읽었다. ‘문고판’도 읽었고, ‘월간지’를 읽었다. 그들이 읽었던 것들은 책의 빈곤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풍요였고, 그래서 한 번 읽고는 창고에 박히는 요즈음 책들과는 달리 되새김질 하듯 읽게 만드는 격조가 부여될 수밖에 없었다. 책 표지를 잡지나 신문지로 포장하여 팔에 끼고 걷던 시대였다. 머릿속에 각인된 것들은 명작이고, 고전이며, 문학소년 같은 것이었다.
그때의 어린 학생들이 장성하면서 어떤 새로운 문화적 수요를 만들었는가 생각해 본다. 독서 문화가 풍성해졌는지, 그 속에서 어떤 매니아들이 새로운 전문가 지위를 만들면서 이 문화를 이끌었는가 생각해 본다. 그래서 우리의 대화 속에 작품이 인용되고, 우리의 정신적 사유 속에 고전의 세계가 자리 잡으며, 상상적으로 창조해 낸 세계들이 저마다 비교 우위를 뽐내며 풍성한 현실 세계를 만들었는지, 90년대에, 혹은 새천년에…….
딱히 답을 가지고 있지도 못하면서 이런 느닷없는 질문을 던져 놓는 것은, 어쩌면 우리 세대들이 지금 힙합에 빠져들고, 블로그에 빠져들고, 밀리터리와 얼리어댑틱한 소비품들과 미시적 관심거리들에 빠져드는 요즘 세대들보다 더 빈곤한 문화 향유를 했던 것은 아닌지 고민스럽기 때문이다. 독서 취미 세대들이 독서 문화의 자양분을 풍부하게 하지 못하고, 독서 문화의 저변을 넓히지 못한 까닭에, 독서와 독서교육에 관한 ‘환호 받는’ 전문가들을 양성해 내지 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고민인 것이다. 만약 맞다면, 우리 세대야말로 독서가 필요하고, 독서교육도 우리 세대에 시급할 수밖에. 아이들만 재촉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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