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각 단계의 명칭이나 시기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다소간의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 여부와 무관하게, 이러한 단계 설정은 그 자체로 특정한 시기에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특정한 독서 능력이 있다는 관점을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교육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만약 특정한 시기에 특정한 독서 능력의 발달이 의미 있다면,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기에는 특히 강조하여 집중할 독서 교육의 내용을 따로 설정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그 중에서 ‘독립적 독서’, 다른 말로 ‘책을 독파(讀破)해 내기’에 관해 잠깐 동안 생각해 보기로 한다.
‘책을 독파해 낸다’는 말은 세 개의 어절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각각의 어절은 ‘대상’과 ‘행위’와 ‘주체의 심리’를 각각 반영하고 있다. 누구에 해당하는 얘기인가? 대략하여 중학교 2학년에서 고등학교 1학년에 이르는 학년군의 학생들에게 해당하는 얘기이다.
이들에게 독서의 ‘대상’은 이제까지 내내 ‘글’이었던 것으로부터 ‘책’으로 이행한다. 그 이행은 꽤 중대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책’이 ‘글’과 어떻게 다르기에? 글자를 풀이하면, ‘책(冊)’은 종이를 여러 개 엮고 묶어서 하나로 매어 놓은 물건을 뜻한다. 처음부터 물리적 실재성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부터 글과는 변별된다. 물리적 실재라는 말은, 그 안에 있는 내용들이 내용 자체의 질서에 의해 엮이기 이전에―어쩌면 ‘엮여 있다기보다는’― 이미 물리적으로 엮여 있었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존재하는 방식 자체가 글과는 달리 단일하거나 일관되거나 심지어는 통일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책’은 여러 ‘글’들이 묶여 하나의 형태로 만들어진 언어의 형식이다. 각각의 글에는 각각의 주제들이 담긴다. 각각의 글들이 구별되는 한에서는 여러 개의 글들은 하나의 글처럼 읽을 수 없다. 그래서 ‘책’을 읽는 데에는 불가불 하나의 글을 읽는 것과는 상당히 다른 독해 능력이 요구된다. ‘책’을 읽는 데에는 요약하고, 통합하고, 일반화하는 독해 능력이 동원된다.
아동은 유아기에 처음으로 책을 접한다. 거의 초등학교를 입학한 후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읽는 책만큼을 유아 단계에서 본다고 할 정도로 유아기의 아동은 많은 책을 보게 된다. 초등학교 1, 2학년에 읽는 책의 권수도 상당히 많은 편이다. 아마도 그 이후에 읽게 될 책들을 모두 합친 것만큼 될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이라면 사람은 성장하면서 책을 더욱 덜 읽게 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주 개인적인 경험 하나를 말해 보자면,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는 사 년 간 천 권의 책을 읽어 보겠다고 호기를 부렸던 때가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일 년에 백 권쯤 읽어야지…… 하고 꼬리를 내려 목표를 수정했는데, 졸업할 때까지 그걸 채우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른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책을 보거나 읽는 행위는 아동에게 매우 강력하고 긍정적인 독서 체험이 된다. 하지만 유아기나 초등학교 저학년 시기에 보거나 읽는 책은 ‘책의 꼴을 갖추었다’는 의미에서의 책이다. 말하자면 글을 책의 형태로 만들어 놓은 까닭에 여전히 독서 능력은 글을 읽는 능력의 범주 내에 존재한다. 그 이후 시기(초등학교 2~4학년 시기)에 아동들은 독해의 기초 기능을 중심으로 글을 읽게 된다. 그 이후 시기에도 본격적으로 읽는 것은 완결된 형태의 ‘글’이다. 그러니까 문자 해독기에 강렬하게 경험한 ‘책 읽기’의 기억은 6, 7년 이상 더 강화되거나 고양되기 쉽지 않다. ‘책’ 읽기에 대한 교육이 아직까지는 없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은 주로 과외의 부담처럼 여겨질 수 있다.(다행히 초등학교 때의 일제식 책 읽기는 ‘하나의 이야기’로 이루어진 책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이 ‘이야기책’들은 ‘글’의 관습에서 아직 그다지 멀어지지는 않았다.)
비로소 ‘책’ 읽기를 배우게 되면, 독서 체험의 새로운 경지가 열리게 된다. 물론 초등학교 때 읽었던 이야기책들의 변형에 해당하는 책들이 여전히 다양한 경로를 통해 풍부하게 제공될 수도 있겠지만, 이때부터는 ‘읽어야 할 책’들의 세계가 열린다. 동원되어야 할 독서 능력도 더 통합적이게 되고 그만큼 부담도 커진다. ‘책’은 ‘편집’을 필수적 조건으로 한다. 편집은 책의 형태에도 작용하며, 책의 형식에도 작용하지만, 무엇보다 독서 행위의 과정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책’을 읽는 과정은 각각의 ‘글’을 읽는 과정을 단순 총합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책’을 읽을 때에는 어떤 글의 의미를 특별히 강조할 수도, 반대로 어떤 글의 의미를 의도적으로 축감시킬 수도 있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유로 인해 ‘책’ 읽기에 따른 성취감도 질적 변화를 겪는다. ‘글’을 읽을 때에는 상대적으로 그 중요성이 낮을 수밖에 없는 ‘대강의 의미를 파악하기’ 같은 전략적 독서가 ‘책’ 읽기에서는 가능하다. 이 전략적 독서는 ‘책’을 전체로서 보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읽기 행위의 과정에서 기쁨을 얻는 ‘글’ 읽기와는 달리 읽기 행위의 종료에서 기쁨을 얻게 한다. 그것은 ‘책’ 읽기에서 책을 ‘장악’했다, 혹은 ‘간파’했다, 혹은 ‘내 것으로 만들었다’ 같은 이해의 수준을 가능하게 한다. 그것을 ‘독파(讀破)’했다고 말한다.
이것을 두루 널리 사용되는 ‘통독(通讀)’이라고 개념으로 풀이해 보자. 통독은 글 전체를 설렁설렁 빠르게 읽어 내는 것처럼 얘기되지만, 새삼스러울 것도 없이 통독은 읽기의 분량이나 읽기의 속도에 관한 개념이 아니라 읽기의 성격에 관한 개념이다. ‘통독’의 통(通)은 ‘꿰뚫는다’는 뜻이 아닌가.
‘책’을 ‘독파’하는 것, 그것이 주는 성취감은 ‘책이 내 것이 된’ 데서 비롯된 성취감이니, 이전까지 ‘글’을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고심하며 학습해 왔던 독해의 성취감이 이에 비할 바 없다. 문제는 그것이 독서의 인생에서 상당히 뒤늦게 찾아온다는 것일 뿐. 되돌아 독서 교육이 이루어지는 교실과 가정과 사회의 이러저러한 장면들을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기고 만다. 우리는 그러한 성취감을 갖게 할 어떤 실천을 어떤 장면에서 수행해 왔었는가? 수행하고는 있는 것일까? 불행히도 나는 우연히 기회에 인해 얻었더랬다. -끝-
한국독서학회 누리집, 독서 칼럼, 2009. 3. 최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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