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어요.”
아이에게 책을 읽히고 나서 그 내용에 대해 물었는데 아이가 더도 아니고 (물론 덜도 아니겠지만) 한마디 표현으로 간단히 대답했다면 여러분은 이 글은 주의 깊게 읽어둘 필요가 있다. 아이의 표정이 책 내용이 그저 그랬다는 듯이 심드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자못 흥미진진하다는 듯이 또랑또랑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다.
이 글은 이를테면 “재미있었어요.” 같은 한 단어 문장의 반응에 대한 얘기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독서 이론은 다음과 같은 진단을 내릴 수 있다. 첫째, 보통 책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개의 글이 합쳐진 것으로 하나의 주제로 간단히 평하기가 쉽지 않다. 책에 대한 전체적 인상을 ‘재미있다’라고 표현했다면, 이 아이는 읽은 내용을 통합적으로 이해했다고 볼 수도 있다.
둘째, 하지만 이는 초등학교 저학년까지의 얘기다. ‘재미있다’는 말은 책이 재미있었다는 경험 내용을 가리켰을 수도 있지만 책을 재미있게 읽었다는 경험 형식을 가리켰을 수도 있다. 만약 후자라면 아이는 아직까지는 자신이 읽은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초등학교 중학년의 아이에게서 단지 ‘재미있다’는 반응만을 들었다면, 아이는 아직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여러분은 아이에게 무엇이 재미있었는지를 재차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셋째, 한편 아이가 습관처럼 ‘재미있다’라고 반응한다면, 이 아이는 읽은 내용을 상세하게 회상해 내거나 재구성하는 능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을 수 있다. 글은 독자가 그것을 읽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보가 기존의 정보에 계속 덧붙여지는 방식으로 완성된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로서는 책을 읽는 동안 자신이 읽은 내용을 기억 가능하고 회상 가능한 형식으로 끊임없이 통합하고 재조직해야만 글에 대한 이해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책을 읽고 나서 그 내용을 통합하거나 재조직하여 표현하지 못했다면, 이 아이는 읽은 내용을 포괄적으로 파악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상세하게 이해하지도 못했음을 뜻한다.
책을 읽을 때 요구되는 독서 능력은 발달 수준에 따라 다르다. ‘재미있다’는 반응은 유년기에 속하는 대부분의 아이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중학생 이상에서는 이 말이 여러 다른 표현들로 분화된다. 흥미롭게도 여기에는 서로 다른 독서 능력이 관련되어 있다. 만약 '반지의 제왕' 3부작을 모두 읽은 5, 6학년 정도의 초등학생과 고등학생이 각자 자신이 읽은 느낌을 말했다고 해 보자. 일반적인 경우라면 아마도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올 것이다. “마법사도 앨프족도 기사도 아닌 키 작고 힘없는 호빗 종족의 프로도가 절대반지를 운명의 산에 있는 용암 속으로 던져 넣어 세계를 구해낸 것이 가장 재미있었어요.” “이 이야기는 환상적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적이에요.”(어라, 앞의 반응이 더 높은 능력을 보여주는 건 아닐까? 초등학생의 정상적인 반응이라니…… 하고 궁금해 하실 독자께서는 조금만 기다려 주시라.)
초등학교 중학년에서 중학교 저학년 시기의 학생들에게서는 대개 학년에 상관없이 ‘재미있다’는 포괄적인 인상을 담은 반응이 독후 감상의 대표격이 된다. 인지 발달 단계로 보면, 어느 정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경험 내용을 개념화할 능력이 아직 부족하기는 하지만, 이 시기에도 ‘재미있다’ 앞에 자신의 경험 내용을 구체화할 단서와 근거들을 보강함으로써 정확하고, 섬세하며, 풍부하게 이해할 능력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이때 “영웅이 아닌 프로도가 세계를 구했다.”라는 근거를 말할 수 있는 능력은 읽은 내용을 ‘요약’하는 능력이다.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라는 반응은, 앞의 반응보다 더 간단하고 쉬운 게 아닌가 하고 생각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추상과 개념화가 가능할 때 비로소 나타나는 훨씬 높은 수준의 독서 능력을 반영한다. 그러니까 판타지가 지닌 핵심적인 속성을 이해한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라는 반응은 ‘재미있다’는 피상적인 반응을 개념화하면서 선택한 훨씬 고급한 이해라는 뜻이다. 여기에 동원되는 능력은 읽은 내용을 ‘통합’하는 능력이다.
물론 중요한 것은 이러한 말들도 절대적인 독서 수준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앞서 세 번째 진단을 참조하시라.) 이 표현들도 읽은 내용에 대한 통합적 이해에 따라 주의 깊게 선택된 것이 아니라면 그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관용적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중학생 정도의 아이에게서 이러한 표현을 듣게 되었다면, 여러분은 아이의 조숙함에 기꺼이 놀라워해도 되지만, 만의 하나라도 표현만을 익힌 반응이 되지 않도록 유념해야 할 것이다.
자, 이제 슬슬 본론이자 결론을 말할 때가 되었다. 이 글의 속셈은 창의적인 책 읽기란 무엇인지 보여주는 데 있다. 창의성이라 하면, 우리는 무엇인가 신기하고 놀라운 것이 있겠거니 하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효과이고 새롭다는 것이야말로 창의성의 핵심이다. 그렇게 본다면 본디 책 읽기라는 것 자체가 창의적인 활동이다. 책을 읽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가치 있는 의미 작용이 일어난다. 그 작용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창의적인 책 읽기이고, 그렇게 되게 하기 위해 조심스럽게 읽기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 또한 창의적인 책 읽기이다.
한 마디의 문장에 담긴 독서 감상은 어떻게 창의적인 책 읽기로 연결되는가. ‘재미있다’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에게 창의적인 책 읽기의 반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이가 성장하면 그 아이가 읽는 책 속의 세계도 함께 성장한다. 좀 더 복잡해지고 우울해지며 심오해진다. 아이는 거기서 기쁨도 찾을 수 있고 슬픔도 발견할 수 있다. 현실도 보게 되고 꿈도 꿀 수 있다. 이렇게 발견하고 찾은 세계를 한 마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를 배워야 한다. 이미 알고 있는 언어와 비교하면서 새로운 언어의 용법을 익혀야 한다. 그 언어를 통해 읽은 내용을 이해하는 것, 그것이 창의적인 책 읽기이다.
사려 깊음이 있다면, 한 마디 문장의 반응은 결코 게으름의 표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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