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쓰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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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비가 와도 젖는 자는 ㅡ 오규원의 시가 어려워서

전운이 깔린 저녁이다 전황이 질척일 낌새다 흉흉한 소식을 전하는 전령 같이 밤 바람이 지나자 배수진마냥 도로를 뒤로 하고 희고 검은 참호들이 진지전을 펼친다 ㅡ 하지만 그들은 이동한다 ㅡ 참호마다 눈을 밝히고 짧은 사이렌을 수시로 울려 공습에 대비하는, 준비된 자들이 그 참호 속에 있다 ㅡ 그들은 이동한다 ㅡ 이내 대규모 공세가 시끄럽게 방어진을 흔들겠거니 하던 예상과 달리 하늘은 조용히, 거스를 것 없이 지상에 강림한다 ㅡ 그들은 어디론가 이동한다 ㅡ 그들은 떠나고 벽과 담들은 무너져 버린 전세를 보도한다 하늘은 지상을 거의 점령했고 간신히 남은 전선의 중간지대에서 담배 한 대 피울 동안의 낭만스런 능청을 연기할 여유도 빼앗기고 참호에서 내쫓겨 잠시 담벽으로 피해 서 있던 오후마저 피로했던 외로운 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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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웃으세요

웃으세요 과도하게 낙천적이세요 이 구물거리는 하늘 아래서 새삼 좋은 표정아 (2019.03) * 조커의 웃음은 이 시의 화자의 그것에 대응한다. 말하자면, 어찌 그렇게 낙천적인 웃음이 가능한 것인가 되묻는 것이다. 그러니 1연에서 '웃으세요'는 '(내가 보니 당신은) 웃으시는군요!'이거나 '웃으시는 거예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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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내게 강 같은 평화 - 장정일의 '삼중당문고'풍 엘레지

잃어버린 많은 노래들 중에 한 자리 차지하는 복음성가, 내게 귀를 울리고 이내 마음을 울리는 복된 소리여야 해서 그걸 다시 노래로 엄숙하게 예배의 의식으로 부르는 게 이상해 보이는 복음성가, 복음이 마음으로부터 울려나와 곡조를 갖게 된 것이 아니라 자기암시를 강하게 걸어 간절하게 염원하며 불렀어야 했으니 어울리지 않는 복음성가, 그중에 그다지 평화롭지도 않으면서 간신히 흐르는 물길 같은 평온이라도 찾으려 불렀던 이 노래, 복음성가였던 것일까, 'We shall overcome'보다 더 긴장되고 맹목이었던 이 노래, 부흥회 분위기와 어울렸던 이 노래, 대학에 들어가면서 더 이상 부르지 않게 된 이 노래, '님을 위한 행진곡'이 가져다 준 평화, 강 같은 평화 넘치네. (20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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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발톱

손톱만큼 작은 것이 손톱보다 강하다며 방바닥에 위세를 떨쳤겠다 손톱보다 험한 일을 한다면서도 손톱만큼 자주 깎이는 건 거부했겠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는 곳을 지향한다며 은밀히 내 양말을 구멍 내고 있었겠다 서서히 네 본 모습을 드러내면서 (2018.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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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방학(放學)은 죽은 것임에 틀림없다

강의를 모두 끝냈다 내게 또 다른 4시간, 또는 24시간이 생기지 않았다 과제를 내어 주고 과제물을 받았다 한 장 한 장이 숙제처럼 도무지 넘어가지 않았다 미뤄 두었던 상담 계획을 다시 세우기도 전에 학생들이 집으로 돌아갔다 미뤄 두었던 논문들을 진행하기도 전에 학술대회 발표의 기억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새벽은 어제와 다름없이 흰 벽지만큼 밝고 그 틈에 더위가 장마와 함께 밀려왔다 나는 며칠 입은 후줄근한 바지를 다시 입고 샌들을 신고 점심 때 가까이 되어 출근했다 그것이 나의 소심한 반항이었고, 연달아 세 번의 회의가 무관심한 관심의 표정으로 나의 외모를 관조했다 (2018.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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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명당자리

선생님의 침이 튀는 곳이 명당자리입니다 그렇군요 생명수 생명의 말씀 은혜를 폭포수 같이 입기 위해 나란히 줄지어 선 자리의 끝자리의 이슬이라도 묻기 위해 애쓰는 그곳은 그래도 명당자리, 그 가느다란, 알 수 없는, 동아줄 - 딸의 졸업식장에서 교장님의 말씀이 오직 공기로만 전달되는 끝자리에서 자리에 대해 얻게 된 깨달음 (2015. 3. 19) * 왜 이 두 사진이냐고 묻는다면, 결국 저 침 튀기는 거리만큼 가까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 같기 때문이라고..... * 왜 사진들이 적당히 과거의 것들이냐고 묻는다면, 다 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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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집나들

터부터 잡고 집안 돈을 다 그러모았던 공동의 단독 주택 멀지 않아도 가 볼 엄두가 안 났던 말뿐인 전원주택 그 새 헐고 퇴색한 언덕 위 하얀집 팔기도 어렵고 손 대기도 힘든 이 집을 한 달만에 찾아왔다 쓸데없이 누가 있소 하고 들여다 보고 이곳저곳 들춰보고 실망하고 그제야 설렁설렁 집 생활인 듯 일을 벌인다 나름 텃밭 흉내 내며 심어 두었던 배추 고추 깻잎대는 거반 시들고 무엇과 무엇과 들국화 제 멋으로 자라 힐난과 칭찬을 겸한다 결국 되돌아올 것을 (20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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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作] 나는 어느 여름 날 햇볕 쏟아지던 하늘을 기억한다

어딘지도 모르고 다만 버스가 도달한 종점 날은 눈부시고 거리엔 사람들이 없었다 잎 무성한 양버즘나무 그늘로 피해 나는 처음으로 너의 얼굴을 보았다 눈부신 복장을 하고 햇볕 앞에 서서 너는 나를 이 여름날의 증인으로 불러냈다 산 넘으면 바다가 있으리라던 어린 나의 상상은 꿈속에서는 언제나 진실이었지 이 종점에서라면 바다는 진즉 건넜어야 했다 그러니 그건 바다가 아니라 하늘이었을 것이다 나는 도저히 도로로 나가 맨눈으로 너를 볼 자신이 없었기에 눈부신 너 대신 차라리 햇볕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눈이 멀고 돌아갈 버스는 보이지 않았다 (2018.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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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충전지

나는 충전지를 생각한다 잘 충전되지도 않는 네모 난 두툼한 충전지 어딘지도 모르게 방치되었다가 내어주기보다 더 많이 빼먹게 된 충전지 가만히 있는 와서 손 뻗어 줄 누군가를 기다리는 이름은 중요치 않아도, 거만하기만 한 충전지 무거워 잘 돌아다니지 않는 껍데기를 벗기면 하루에도 여러 번 완전히 다른 속내를 가지는 완고하면서도 완고한 충전지 충전되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 두려우면서도 가만히 있는 충전지가 나를 생각하는구나 (2018.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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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시] 숲길에서

숲길에서 작은 산길 그 어디쯤에서 나는 멈추었지 나무는 높지 않았지 길은 좁아도하늘은 다 보일 듯 별들이 어둠을 밀어내고서늘한 공기는 뜨거운 가슴을 밀어올리고 있었지밀어올리고 있었지 숲은 달뜬 한 사람을 끌어당기고 있었지 산 위 더 뜨거운 기운들은 달뜬 한 사람을 어두운 하늘에서는 별들이 성큼 다가서고 별들이 지나는 길 그 어디쯤에서 나는 멈추었지밝은 눈을 뜨고, 그이는 보이지 않았지 나무는 높지 않았어도산들을 다 가릴 듯 어둠이 길을 가리고 서늘한 눈은 뜨거운 가슴을 찾아 온 산을 훑었지작은 산길을 오르고 있었지 그 사람은 산길을 걸으면서도 하늘을 보고 있었지숲은 넓어 갈 길이 먼 그 사람은 내게 묻고 있었지 너는 이 땅에서 무엇이냐고 이 높은 곳에 이르러 뜨거운 마음으로 너를 찾고 있을 때도너는 흔적..

misterious J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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