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간 전쯤 들어와 있던 환자는 연방 신음을 내고 있다 그 소리는 절반은 여왕의 목소리 절반은 이방인의 목소리를 닮았다 소리는 전언의 중계자를 찾고 있었지만 신경 쓰는 사람은 나 하나인 듯했다 나는 통역의 능력을 갖지 않았다 그는 곧 이곳의 여왕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성 안에는 나의 여왕이 있다 이 성에서 밤을 새 본 문지기는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밤중을 찾을 여왕 추대자들은 없으리라 그 대신 앞으로도 계속 들이닥칠 먼 나라의 사자들이 성 밖에 이미 도착해 준비하고 있다 소리는 점차 중계자 없이도 여왕의 권위를 닮고 있었다 나의 늙은 여왕은 그 사이에도 수많은 사자를 물렸고 그럴 때마다 칭병을 핑계로 삼았다 하지만 먼 나라에서 온 사자는 사랑도 없이 사랑의 징표를 잔뜩 준비했다 나는 늙은 여..
(수정중, 2021.02.28) 어느 날 신경 가닥이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가 한 올 한 올마다 감각들이 살아났다 머리카락은 모자를 감당하기 힘들어졌다 어떤 군인들은 모자를 대신해 제복을 화려하게 맞춰 입었고 계급을 수놓을 원사의 색상 표준화가 시급하고 중요한 안건이 되었다 어떤 군인들은 머리카락을 불온사상의 온상으로 금지시켰다 감각을 기피하는 유행이 계속되었고 병졸들에게는 고통이 억압의 다른 이름이었다 머리카락은 조금이라도 자라면서 무거워 감당하기 힘들었다 긴 머리카락은 보험 적용을 못 받는 사람, 그 대신 짧은 머리카락은 신부, 승려, 목사가 맡았다 세상은 구원받지 못한 곳, 묶어놓아도 아프고 땋아놓아도 아팠다 묶지도 땋지도 않고 풀어놓아도 바람에 나부끼니 고통스러웠다 머리카락으로 먹고 살던 이십이만 ..
매일경제의 2021년 2월 21일 인터넷 기사에 '여여여여여여여여여..남교사 실종사건'이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미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이 문자의 시각화 전략은 꽤나 선동적이다. 초등학교 현장에서 여교사의 편중이 심하다는 전제에서 시작한 기사는 그 편중됨의 문제로서 "학생들이 다양한 시각을 기를 기회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맞다. 그럴 우려가 있다. 아니다. 그거 잘못된 문제 설정이다. 사실 '성 역할 교육'이라는 것이 '성 역할 고착화 교육'으로 여겨질(최대한 중립적인 표현을 사용했다) 우려가 있다는 생각을 해 보면, 기사의 '다양한 시각'은 섣부른 논리화를 전제한 것이 맞다. 그런데 교육 현장에서 다수의 여교사와 이른바 '다양한 시각'을 자연스럽게 연결하는 것도 현재로서는 어려운 것..
미스테리어스는 Jay의 두 번째 캐릭터 미스티블루가 꿈꾸던 은밀한 욕망 경이롭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의 이름을 비틀어 세상에 없는 철자를 입고 자라난 뻔뻔하고 재기 넘치는 재연의 연기자 기술과 환영으로 영웅이 되었던 미스테리오와는 혼동하지 마세요 그는 이트륨을 가지고 있고 내게는 아이오딘이 있지요 미스테리오가 비열한 욕망으로 추락하기 전부터 루차도르, 루차도르! 레이 미스테리오에 영감을 받았던 캐릭터 선과 악이 혼란스러운 세계에선 가끔 빌런도 흉내 내 보고 본체가 하고 싶은 일을 멋대로 대신 해 보는 미스테리어스 미스티블루가 있기 전 깊고 푸른 밤이 있기 전부터 우울한 회의주의자에게 남아 있던 희망의 내면 풍경 (2021.02)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오늘도 여러분과 한 시간좋은 노래와 사연으로행복하게 보냈네요아, 그리고 인터넷으로 실시간 참여하시는 시청자 여러분도 계신데요오늘도 많은 분이 사연을 남겨 주셨어요동접 삼천 분, 좀 아쉽지요. 우리 동접자 만 명 목표 채워 봐요그 중에 몇 분의 사연만 읽어드리게 된 것도 아쉬운데요특이하게도 오늘은 그림 엽서 한 통이 스튜디오에 도착했네요요즘 엽서로 사연 신청하는 거 여러분도 낯설 거예요여행 중에 일부러 보내신 듯한데, 와 ㅡ 보내신 지 사 개월만에 도착했어요유튜브로 보시는 시청자 분들께서는 이거 보이시죠앞, 뒤, 이렇게신청곡이 그때는 인기절정의 곡이었는데 죄송해요, 오늘은 곡들이 꽉 차서다음에 기회되면 꼭 보내드릴게요아, 그리고 채팅창으로 계속 비티에스 신곡 틀어달라고 하신사막여시97..
바람은 시시각각 방향을 바꾼다지만 나에게는 언제나 같은 방향이다 바람을 마주대하기로 했을 때에는 가야 할 방향을 정해둘 까닭이 없다 다르게 부는 게 바람의 생리인 듯해도 바람은 항상 같은 방향으로 분다 바람에 묻어 있는 냄새는 산에서 내려오는 것과 골목을 훑고 나오는 것이 다르다, 길 건너는 횡단보도의 노란 페인트 줄무늬 위에서 다르고 첫 번째 골목인가 힐끗거리다가 갑자기 방향이 바뀌어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설 때도 다르다 바람이 기억에조차 없는 옛동네로 나를 인도할 때 알 수 없는 방향에서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는 다만 나는 바람에 묻은 무수한 냄새들을 따라 바람의 길을 찾는다 항상 거기 있을 것만 같은 동네로 바람이 나를 이끌리라 하지만 바람은 수시로 방향을 바꾸고 나는 그곳이 어디인지 모른다 바..
서울 밝은 달 지는 새벽 못 마친 일을 남기고 자리에 들었을 때 딱 걸렸다 너는 ㅡ 헐고 약해진 몸이란 어찌할 도리 없는, 이미 벌어진 순리 ㅡ 다들 그렇게 나이가 들어가는 ㅡ 잠도 안 오는데 깨어 있는 ㅡ 책상 위에 아직 끝내지 못한 일들이 남아 있는 은밀한 손길로 다시 안경을 찾아와 건네줄 때 너는 나를 고장내고 있었던 게다 그리하여 방금 나는 고장나고 있는 몸의 경과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내 것 아닌 양 빼앗고 은밀히 언젠간 버릴 요량이었다가 들켜버린 채 멀쑥한 표정으로 어깨를 한 번 으쓱거리며 나와 같은 곳을 보고 있는 너는 (2021.2.13)
표현 / 표현 양식 / 대차 표현 / 상상력으로 진부한 표현을 메꾸기 클리셰는 표현의 관습 중 하나로서 흔히 틀에 박힌 표현을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이다. 표현 층위의 일반적인 요소들에 비해서 구조 층위에 작동하는 기제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표현 양식의 하나로 규정될 수 있다. 클리셰는 표현의 진부함과 고정관념, 지루한 관습성 등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되고는 있지만, 다른 한편에서 생각하면 클리셰로 인해 작품 전체의 주제나 구성 등에서 불필요한 설정과 기술을 낭비하는 일을 막을 수 있다. 클리셰에 따라 독자는 상상으로 비어 있는 기술들을 메꾸어 맥락을 구성하며 후경화한다. 따라서 구체화되거나 풍성화되는 것과는 다른 효과가 생긴다. 이런 점에서 클리셰는 중립적 개념이 될 수 있다. Tropes Are..
시라고 쓰는 데 이어쓰다가 다시 행을 내려쓰면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이어쓰고 내려쓰는데 뜻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서 내려쓴 것일까 내려쓰고 보니 뜻이 달라진 것인가 사랑의 블랙홀 여섯 시면 다시 시작되는 반복의 세상 매번 다른 선택이 처음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고쳐 쓰기를 하면 새로 쓰기가 따라와서 고쳐 쓰기를 실패하게 되는 시 쓰기의 딜레마 시라고 쓰는 데 이어쓰다가 다시 행을 내려쓰면 같은 뜻인가 다른 뜻인가 이어쓰고 내려쓰는데 뜻이 달라지면 뜻이 달라서 내려쓴 것일까 내려쓰고 보니 뜻이 달라진 것인가 (2021.01)
메타포는 상징이 아니다. 상징처럼 텍스트의 모든 표상들이 어떤 메타포(들)에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메타포는 불가피하게 잉여적 정보를 남겨두며 좋은 메타포는 그것과 연결되지 않는 잉여적 정보로 인해 숨겨진 보석처럼 존재하게 된다. 모든 것을 메타포로 연결하려 읽으려고 하는 것이 과잉해석과 오독을 낳는다. - misterious